2014년 1월 18일 토요일

1.21사태/청와대습격사건/김신조사건/실미도사건/청와대기습미수사건





실미도사건 [實尾島事件]

실미도는 인천에서 20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무인도로, 1968년 당시 중앙정보부가 북파공작원을 양성시키기 위한 특수부대를 만들었던 곳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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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68
1 21일 밤10시경, 북한특수부대 124군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까지 침입하였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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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들 공비들은 우리 군경과의 격렬한 전투 끝에 공비 30명이 사살되었고, 이들 중 생포된 김신조는 "박정희, 목따러 왔수다."라고 말해 TV를 지켜보던 국민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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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박정희 정부는 4 1일부터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으며, 북에 대한 보복으로 평양의 주석궁을 습격하기로 하고 31명의 청년을 불러 모았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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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들이 격리ㆍ수용되어 지옥 훈련을 받았던 곳이 인천 앞바다의 외딴 섬 실미도이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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실미도 부대(정식 명칭은 '2325 전대 209 파견대' 1968 4월에 창설됐다고 해서 '684부대'로 불리기도 함)는 전과자와 민간인으로 꾸려졌으며, 3년여 동안 가혹한 훈련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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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3 4개월 동안 출동 명령만을 기다리다가 1970년대 초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북파 임무가 취소됐으며, 이들의 존재가 외부에 공개될 것을 우려한 정부는 기간병들에게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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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지만 당시 같은 부대에 있던 기간병 24명 가운데 18명이 훈련병들에 의해 살해당했으며, 훈련 중 사망한 7명을 제외한 훈련병 24명은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시내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향하였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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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총격전 끝에 대부분의 부대원이 수류탄을 터뜨려 자살을 하였고 4명만이 생존하였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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생존자 4명도 1972 3월 사형당했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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정부는 이 사건을 북한 무장간첩이 서울을 침입하여 군인들 간의 교전 끝에 이들을 사살한 북한 소행의 '실미도 난동사건'으로 발표, 30여 년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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북한특수부대의 존재를 최초로 확인시켜 준 이 사건은 1999년 백동호의 장편소설 <실미도>가 출판되고 그해 연말 SBS 시사/교양 프로그램 <그것이 알고 싶다>에서 다루어지면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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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편 이를 바탕으로 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 <실미도> 2003 12월 개봉 한국 최초 1000만 관객 동원이라는 기록을 세워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으며, 영화 상영을 계기로 실미도사건이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되었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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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에 2004년 열린우리당은 실미도사건 희생자 문제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등을 위한 ‘실미도사건 진상조사위원회’를 구성하였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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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05
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실미도사건 진상조사를 시작했고, 그해 11월 벽제 서울시립묘지에서 실미도 부대원 유해발굴작업을 벌여 일부 유해를 확인하였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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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나 유해발굴과 부대원 확인 작업까지는 마쳤지만 더 이상의 조치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.

동의어 684부대

참조어 북파공작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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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자료 인용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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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태/청와대습격사건/김신조사건/실미도사건/청와대기습미수사건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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